(출처: 픽사베이)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계속 아파트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실 시골 작은 마을에 가면 화성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곡성>이 먼저 생각나고, 폐교를 가면 <곤지암>이 생각난다. 로컬, 도시재생, 쪽방, 전통시장, 마을 만들기를 그렇게 공부하고 실천했지만 내 개인 공간과 도시가 바로 맞닿는 구조가 익숙하지 않다.
아파트는 ‘내 집, 복도, 엘리베이터, 단지내 보행로, 주차장, 녹지 공간’이라는 넉넉한 울타리(?)가 있다. 그 영역이 익명성 가득한 도시에서 나를 보호하는 버퍼존(buffer zone)이 된다. 사실 이런 버퍼존은 도시와 정부가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인데, 아파트라는 민간영역으로 떠넘기면서 아파트의 특권처럼 되어버렸다.
아파트의 주택공급, 개인의 다주택 소유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정부가 60년 넘게 주거 환경 개선에 집중하지 않고 민간으로 떠넘긴 것이 잘못이다. 민간은 단지 자신들의 고객에게 상식적인 주거환경 우선권을 단지라는 이름으로 준 것 뿐이다.
도시를 염두하고 건축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현준 교수님의 “1개의 큰 도서관, 1개의 큰 공원보다 동네의 작은 도서관, 소규모 공원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할 것이다.
로컬은 지역경제와 새로운 크리에이터들의 등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 생각한다면, 도시라는 공간에 뿌려진 대형 쇼핑몰을 경험하는 방문객이나 관광객으로 멈춰 있는 것일 수 있다. 또 돌봄과 관계의 커뮤니티가 있고 구성원들이 앞장서서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로컬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성과 중심적이고 미시적인 정치인의 시점으로 지역을 바라보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로컬의 그림은 경계가 약한 곳이다. 가장 강한 로컬은 공간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아서 나의 공간과 그 외의 공간이 일상적으로 연결되고, 사람의 경계가 날카롭지 않아서 현지와 타지의 구성원이 쉽게 어울리며, 문화의 경계가 줄 세우기가 아니라서 나의 것을 사랑하고 남의 것을 즐길 줄 아는 곳일 거라는 그림을 그려본다.
(출처: 픽사베이)
유년시절을 보낸 아파트들은 모두 재개발 되어 없어졌고 대학시절을 보낸 공간은 자본 논리의 한복판이 되어버렸다. 조금 천천히 재개발되었다면 이렇게 허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몇 개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며 자신을 지켜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낯설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시대와 도시의 변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변화를 막지는 못해도 잃지 말아야할 무언가가 계속된다면 그나마 다행 아닐까.
작동되는 로컬을 걷는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관광보다 여행이 우리의 감각에 선명하게 남는 것처럼 말이다.
로컬은 무엇인가? 뉴트로, 도시재생, 지역경제 활성이라는 테마가 로컬을 상징하는가? 로컬은 귀향했거나 귀촌한 크리에이터가 만들어가는 것인가? 코로나시대, 뉴밀레니얼 세대들의 시대, 또 그 이후의 시대에는 로컬이 어떻게 변할까? 이런 질문들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작점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성급한 모방과 안타까운 시도들의 폐허 속에 잠식될 것이 뻔하다.
로컬을 어느 청년의 하루라는 시간표로 보자면, 지금은 향긋한 커피와 식사로 잠이 막 깬 이른 아침과 같다. 아직 가꿔야 할 하루가 더 길고, 자리 잡아야 할 인생의 시간표도 한참 남았다.
특정 집단이나 사람, 특정 건축이나 어떤 공간, 대표되는 상품이나 서비스들로 상징되는 ‘명사형’ 로컬이 아니라, 로컬의 명사적 대상들이 어떤 감각으로 상징되는 부사적이면서 형용사적인 ‘상태적’ 로컬이 되기까지 시간이 축적돼 저녁, 그리고 중년에는 자기 정체성이 선명한 로컬이 등장하길 바랄 뿐이다.
원문
http://belocal.kr/View.aspx?No=1066099
(출처: 픽사베이)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계속 아파트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실 시골 작은 마을에 가면 화성연쇄살인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곡성>이 먼저 생각나고, 폐교를 가면 <곤지암>이 생각난다. 로컬, 도시재생, 쪽방, 전통시장, 마을 만들기를 그렇게 공부하고 실천했지만 내 개인 공간과 도시가 바로 맞닿는 구조가 익숙하지 않다.
아파트는 ‘내 집, 복도, 엘리베이터, 단지내 보행로, 주차장, 녹지 공간’이라는 넉넉한 울타리(?)가 있다. 그 영역이 익명성 가득한 도시에서 나를 보호하는 버퍼존(buffer zone)이 된다. 사실 이런 버퍼존은 도시와 정부가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인데, 아파트라는 민간영역으로 떠넘기면서 아파트의 특권처럼 되어버렸다.
아파트의 주택공급, 개인의 다주택 소유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정부가 60년 넘게 주거 환경 개선에 집중하지 않고 민간으로 떠넘긴 것이 잘못이다. 민간은 단지 자신들의 고객에게 상식적인 주거환경 우선권을 단지라는 이름으로 준 것 뿐이다.
도시를 염두하고 건축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현준 교수님의 “1개의 큰 도서관, 1개의 큰 공원보다 동네의 작은 도서관, 소규모 공원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할 것이다.
로컬은 지역경제와 새로운 크리에이터들의 등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 생각한다면, 도시라는 공간에 뿌려진 대형 쇼핑몰을 경험하는 방문객이나 관광객으로 멈춰 있는 것일 수 있다. 또 돌봄과 관계의 커뮤니티가 있고 구성원들이 앞장서서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로컬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성과 중심적이고 미시적인 정치인의 시점으로 지역을 바라보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로컬의 그림은 경계가 약한 곳이다. 가장 강한 로컬은 공간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아서 나의 공간과 그 외의 공간이 일상적으로 연결되고, 사람의 경계가 날카롭지 않아서 현지와 타지의 구성원이 쉽게 어울리며, 문화의 경계가 줄 세우기가 아니라서 나의 것을 사랑하고 남의 것을 즐길 줄 아는 곳일 거라는 그림을 그려본다.
(출처: 픽사베이)
유년시절을 보낸 아파트들은 모두 재개발 되어 없어졌고 대학시절을 보낸 공간은 자본 논리의 한복판이 되어버렸다. 조금 천천히 재개발되었다면 이렇게 허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몇 개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며 자신을 지켜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낯설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시대와 도시의 변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변화를 막지는 못해도 잃지 말아야할 무언가가 계속된다면 그나마 다행 아닐까.
작동되는 로컬을 걷는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관광보다 여행이 우리의 감각에 선명하게 남는 것처럼 말이다.
로컬은 무엇인가? 뉴트로, 도시재생, 지역경제 활성이라는 테마가 로컬을 상징하는가? 로컬은 귀향했거나 귀촌한 크리에이터가 만들어가는 것인가? 코로나시대, 뉴밀레니얼 세대들의 시대, 또 그 이후의 시대에는 로컬이 어떻게 변할까? 이런 질문들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시작점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성급한 모방과 안타까운 시도들의 폐허 속에 잠식될 것이 뻔하다.
로컬을 어느 청년의 하루라는 시간표로 보자면, 지금은 향긋한 커피와 식사로 잠이 막 깬 이른 아침과 같다. 아직 가꿔야 할 하루가 더 길고, 자리 잡아야 할 인생의 시간표도 한참 남았다.
특정 집단이나 사람, 특정 건축이나 어떤 공간, 대표되는 상품이나 서비스들로 상징되는 ‘명사형’ 로컬이 아니라, 로컬의 명사적 대상들이 어떤 감각으로 상징되는 부사적이면서 형용사적인 ‘상태적’ 로컬이 되기까지 시간이 축적돼 저녁, 그리고 중년에는 자기 정체성이 선명한 로컬이 등장하길 바랄 뿐이다.
원문
http://belocal.kr/View.aspx?No=1066099